스코틀랜드 서쪽 해안에 위치한 아일라(Islay) 섬은 강렬한 피트(Peat) 향으로 위스키 애호가들의 성지로 불립니다. 라가불린, 아드벡, 라프로익 등 쟁쟁한 증류소들 사이에서, 21세기에 등장해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킬호만(Kilchoman) 증류소입니다. 오늘 우리는 킬호만의 핵심 라인업 중 하나이자, 풍부한 셰리의 풍미로 많은 사랑을 받는 킬호만 사닉(Kilchoman Sanaig)에 대해 깊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킬호만 증류소: 아일라의 막내, 전통을 품다
124년 만의 부활과 '농장 증류소' 철학
킬호만 증류소는 2005년 앤서니 윌스(Anthony Wills)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는 아일라 섬에 124년 만에 들어선 새로운 증류소로, 위스키 업계에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킬호만의 가장 큰 특징은 '농장 증류소(Farm Distillery)'라는 정체성입니다. 그들은 직접 보리를 경작하고, 전통적인 플로어 몰팅(Floor Malting) 방식으로 맥아를 생산하며, 증류부터 병입까지 모든 과정을 증류소 내에서 해결합니다. 이는 '보리에서 병까지(From Barley to Bottle)'라는 그들의 철학을 상징하며, 위스키에 아일라의 떼루아(Terroir)를 온전히 담아내려는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킬호만 사닉의 탄생: 거친 해안의 이름을 담다
킬호만 사닉은 2014년에 처음 출시되어 2016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핵심 라인업 제품입니다. '사닉'이라는 이름은 증류소 북서쪽에 위치한 바위투성이의 거친 해안 지형에서 유래했습니다. 킬호만 증류소에 따르면, 거센 대서양 폭풍이 만들어낸 사닉 해안의 극적인 풍경이 위스키의 복합적인 특성에 반영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이름만 빌려온 것이 아니라, 위스키의 성격과 지역의 자연환경을 연결하려는 킬호만의 의도를 보여줍니다.
킬호만 위스키 라인업: 사닉은 어떤 위치일까?
킬호만은 비교적 신생 증류소임에도 불구하고 개성 넘치는 라인업을 자랑합니다. 사닉은 그중에서도 셰리 캐스크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제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핵심 라인업: 마키어 베이 vs 사닉
킬호만의 핵심 라인업은 마키어 베이(Machir Bay)와 사닉(Sanaig), 이 두 제품이 양대 산맥을 이룹니다. 두 위스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숙성에 사용된 캐스크의 비율입니다.
- 마키어 베이: 킬호만의 플래그십 제품으로, 버번 캐스크(약 90%)의 영향이 지배적이며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약 10%)로 마무리하여 균형감을 더했습니다. 신선한 시트러스와 바닐라, 가벼운 피트 스모크가 특징입니다.
- 사닉: 마키어 베이와 반대로,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약 70%)의 비중이 훨씬 높고 버번 캐스크(약 30%)가 뒤를 받칩니다. 이로 인해 건포도, 다크 초콜릿과 같은 풍부하고 진한 과일 풍미가 피트 스모크와 어우러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캐스크 구성의 차이는 두 위스키에 뚜렷한 개성을 부여하며, 소비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버번 캐스크의 경쾌함과 셰리 캐스크의 깊이감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한정판과 특별 에디션
킬호만은 핵심 라인업 외에도 매년 다양한 한정판을 출시하며 실험적인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100% 올로로소 셰리 캐스크에서 숙성한 로크 곰(Loch Gorm), 포트 와인 캐스크에서 숙성한 포트 캐스크 머추어드(Port Cask Matured), 그리고 증류소에서 직접 재배한 보리만을 사용해 만드는 100% 아일라(100% Islay) 시리즈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한정판들은 킬호만의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위스키 수집가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킬호만 사닉 심층 분석: 맛과 특징
테이스팅 노트: 풍부한 과일과 스모키의 향연
킬호만 사닉은 셰리 캐스크의 영향으로 매우 풍부하고 복합적인 맛과 향을 자랑합니다. 여러 위스키 전문가와 리뷰어들의 평가를 종합한 테이스팅 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향(Nose): 잘 익은 자두와 건포도 같은 진한 과일 향이 먼저 느껴지며, 그 뒤를 이어 정향(clove)과 토피의 달콤함이 따라옵니다. 배경에는 흙내음 가득한 풍부한 피트 스모크가 깔려 있어 복합미를 더합니다.
맛(Palate): 입안에서는 자두와 대추야자 같은 셰리 캐스크의 단맛이 풍부한 피트 스모크와 아름답게 어우러집니다. 스모크는 바비큐를 연상시키지만, 재(ash)나 요오드 같은 약품 향이 강하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계피, 육두구 같은 향신료와 다크 초콜릿의 쌉쌀함이 맛의 균형을 잡아줍니다.
여운(Finish): 향신료와 흑설탕의 따뜻함이 입안에 길게 남으며, 스모키한 여운이 부드럽게 마무리됩니다.
전반적으로 킬호만 사닉은 과일의 단맛, 셰리의 풍부함, 그리고 아일라 피트의 스모키함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위스키로 평가받습니다.
주요 특징: 셰리 캐스크와 피트의 완벽한 조화
- 알코올 도수: 46% ABV
- 피트 수준: 50ppm (Parts Per Million). 이는 아드벡이나 라프로익과 비슷한 수준의 강한 피트 처리지만, 킬호만 특유의 증류 방식과 숙성 과정 덕분에 공격적이기보다는 흙내음과 바비큐 스모크 같은 풍부한 향으로 발현됩니다.
- 숙성 정보: Non-Age Statement (NAS) 제품으로, 숙성 연수는 표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젊은 위스키의 활기참과 셰리 캐스크의 깊이가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 색소 및 필터링: 비냉각 여과(Non-chill filtered) 방식을 사용하고, 인공 색소를 첨가하지 않아(Natural Colour) 위스키 본연의 맛과 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알아두면 재미있는 이야기
화재 사건과 아름다운 향기
신생 증류소였던 킬호만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설립자 앤서니 윌스의 아들인 조지 윌스(George Wills)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아버지가 럭비 경기를 보러 간 사이 아들들이 부주의하게 몰트 건조용 가마(Kiln)에 불을 너무 많이 지폈다고 합니다. 결국 가마 지붕에 불이 붙는 사고가 발생했지만,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습니다. 조지 윌스는 당시를 회상하며 "가마는 망가졌지만, 정말 아름다운 냄새가 났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이 일화는 킬호만의 가족 경영 방식과 초창기의 고군분투를 엿볼 수 있는 유쾌한 이야기로 남아있습니다.
구매 가이드: 가격 및 즐기는 팁
킬호만 사닉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아 국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형 주류 판매점이나 전문 리쿼샵에서 구매할 수 있으며, 가격은 750ml 기준 대략 10만원대 초중반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가격은 판매처나 시기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킬호만 사닉을 즐길 때는 니트(Neat)로 마셔 위스키 본연의 맛과 향을 온전히 느끼는 것을 추천합니다. 물을 한두 방울 떨어뜨리면 닫혀 있던 과일 향이 더욱 풍부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풍부한 셰리 풍미와 스모키함은 다크 초콜릿이나 견과류와도 훌륭한 궁합을 보여줍니다.
결론: 킬호만 사닉, 왜 마셔야 하는가?
킬호만 사닉은 전통적인 아일라 피트 위스키에 풍부한 셰리 캐스크의 매력을 더한, 매우 잘 만들어진 위스키입니다. '농장 증류소'라는 뚝심 있는 철학, 거친 자연을 담아낸 이름, 그리고 맛의 완벽한 균형은 킬호만 사닉을 단순한 술이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 느끼게 합니다.
강렬한 피트 위스키에 입문하고 싶지만 너무 거칠고 약품 같은 향은 부담스러운 분, 혹은 버번 캐스크 위주의 아일라 위스키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원하는 분에게 킬호만 사닉은 최고의 선택이 될 것입니다. 아일라의 젊은 거인이 빚어낸 달콤하고 스모키한 유혹에 빠져보시길 바랍니다.